“당신, 진짜 하고 싶은 거 맞아?”
아내가 식탁 위에 놓인 희망퇴직 안내문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회사에서 받아 온 지 사흘째였다. 나는 대답 대신 휴대폰 사진첩을 열었다. 지난주 퇴근길에 찍어 둔 사진이었다. 역 앞 상가 1층, 유리문에 ‘임대 문의’가 붙어 있는 열 평 남짓한 가게였다.
“여기서 김밥집 하면 어떨까 싶어.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 다 이 앞을 지나가잖아.”
아내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휴대폰을 내 쪽으로 밀었다. “가게 말고 당신 얼굴을 보고 싶어서 물어본 거야.”
스물여섯 해를 같은 회사에 다녔다. 쉰둘에 받아 든 희망퇴직 안내문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런데 그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그만두고 싶다’와 ‘그만둬도 된다’가 다른 말이라는 걸 알았다.
■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장사가 하고 싶어서 퇴직을 고민한 건 아니었다. 올봄에 새로 온 팀장은 나보다 열 살이 어렸다. 회의 때마다 내 보고서를 넘기며 “요즘은 이렇게 안 해요”라고 했다. 그날 저녁부터 회사 근처 가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사장이면 저 말을 안 들어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먼저였다.
아내가 물은 것도 그 부분이었을 것이다. 회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오늘 밤에도 진짜다. 하지만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밥을 짓고 재료를 썰고 싶은 마음은 아직 한 번도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 두 마음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앞의 것이 뒤의 것인 척하기 쉽다.
■ 사주로 보면,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들고 싶은 힘
사주 이야기에서 식상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 표현하고,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힘에 빗대어 풀이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회사에서도 남이 정한 양식을 채울 때보다 새 기획을 처음부터 짤 때 가장 신이 났다. 주말이면 아이들에게 김밥을 말아 주는 일도 귀찮지 않았다. 내 손을 거쳐 무언가가 완성되는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맞는 것 같다.
다만 그 힘이 꼭 가게 하나로만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사주를 들여다보며 내가 얻은 건 “당신은 장사할 팔자다” 같은 답이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힌트였다. 그 힌트를 김밥집으로 옮길지, 다른 일로 옮길지는 여전히 내가 따져 봐야 할 몫이었다.
■ 아내가 꺼낸 건 꿈이 아니라 숫자였다
며칠 뒤 아내가 노트 한 권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첫 장에는 우리 집 한 달 고정비가 적혀 있었다. 아파트 관리비, 둘째 대학 등록금을 나눠 놓은 금액, 어머니 병원비까지 빼곡했다. 그 아래에 아내가 한 줄을 더 적었다. ‘가게가 1년 동안 한 푼도 못 벌어도 버틸 수 있는 돈.’
그 줄을 채우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퇴직금에서 얼마를 가게에 넣고, 얼마는 절대 건드리지 않을지 정하는 일이었다. 사주에서 재성은 돈과 현실의 자원을 다루는 감각으로 읽기도 한다. 그날 나는 그 감각이 나보다 아내 쪽에 더 많다는 걸 인정했다. 꿈을 말하는 사람과 숫자를 적는 사람이 한 식탁에 앉아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결정하기 전에 해 볼 수 있는 것들

퇴직 신청 마감까지는 아직 3주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 안에 할 수 있는 일을 몇 가지 정했다.
첫째, 주말 이틀 동안 아는 분의 분식집에서 일을 도와 보기로 했다. 아침 장사가 몸에 맞는지는 머리로 상상해서는 알 수 없다.
둘째, 회사에 남는 경우도 똑같이 진지하게 적어 보기로 했다. 남으면 무엇이 힘들고, 무엇은 지킬 수 있는지 말이다.
셋째, 가게 계약은 퇴직을 결정한 다음에 알아보기로 했다. 순서가 바뀌면 보증금 때문에 결정을 서두르게 된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해도 괜찮아. 다만 그 팀장 때문에 결정하지는 마.”
■ 오늘 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만약 당신도 비슷한 갈림길에 서 있다면, 마음에 둔 가게가 있는 곳에 이번 주말 아침 일곱 시부터 딱 한 시간만 서 있어 보길 권한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몇 명인지, 그중 몇 명이 무언가를 손에 들고 가는지 세어 보는 것이다.
나는 지난 토요일에 그렇게 했다. 생각보다 사람은 많았고, 생각보다 다들 바빴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사장이 되고 싶은 나’가 아니라 ‘저 사람들에게 김밥을 건네는 나’를 떠올려 봤다. 아직 결정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는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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