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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의 외도를 용서했는데, 회식이 늦어지는 날이면 왜 다시 그때로 돌아갈까?

    남편의 외도를 용서했는데, 회식이 늦어지는 날이면 왜 다시 그때로 돌아갈까?

    저녁 아홉 시가 조금 넘어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회식이 좀 길어지네. 먼저 먹어.”

    아내는 데워 놓은 국의 불을 껐다. ‘몇 시쯤 들어와?’라고 썼다가 지웠다. 예전 같으면 스스럼없이 물었을 말이었다. 돌아올 시간이 가까우면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먹고, 많이 늦으면 먼저 먹으려고 묻는 말. 그런데 이제는 그 한마디도 어렵다. 물으면 아직도 남편을 의심하는 것 같고, 가만있으면 그때처럼 나만 모르고 지나갈 것 같았다.

    식탁에는 수저가 두 벌 놓여 있었다. 아내는 남편의 수저를 도로 서랍에 넣었다. 혼자 먹으면 그만인데 숟가락을 들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한 시간 전에도 이 국을 데웠다. 곧 들어오겠지 싶어 불을 줄여 놓았다가 조금 전에 다시 끓인 참이었다. 남편은 이제라도 먼저 먹으라고 했지만, 아내에게는 이미 두 번이나 밥때를 미룬 저녁이었다.

    남편의 외도를 알았을 때, 아내는 오래 고민한 끝에 다시 살아보자고 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왜 남편이 늦는 날이면 마음은 자꾸 그날 저녁으로 돌아갈까?

    ■ 내가 용서한다고 한 말의 뜻

    남편이 돌아왔을 때 아내가 물었다.

    “오늘 몇 시쯤 끝나는지 저녁에는 몰랐어?”
    “몰랐지. 알았으면 얘기했지. 그런데 당신, 아직도 나 못 믿어?”

    아내는 그 말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믿어”라고 하면 아까 문자를 썼다 지운 마음은 어디에 둬야 할까. 그렇다고 “못 믿어”라고 하면 오늘 정말 회식을 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또 무슨 일이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알고 싶었던 건 저녁에 한 번쯤 연락할 틈이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자기 마음을 증명해야 하는 쪽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 남편이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갔던 날에도 휴대전화에는 똑같이 ‘회식이 길어진다’는 문자가 떠 있었다. 그때 아내는 별다른 뜻을 읽지 않았다. 일이 늦게 끝나는구나 싶어서 남편 몫의 밥을 덮어 두었다. 나중에 그날의 사정을 알고 나서야, 아무것도 모르고 밥을 챙기던 자기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아내가 그때 “다시 살아보자”고 한 건 앞으로의 일을 함께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오늘부터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약속까지 한 건 아니었다. 그 차이를 아내 자신도 미처 몰랐다. 그래서 남편이 늦는 날이면 기다리는 일도 힘든데, ‘내가 용서한다고 해놓고 왜 이러지’ 하는 자책까지 혼자 감당했다.

    ■ 사주로 보면, 같은 문자가 누구에게는 다르게 읽힌다

    사주에서 인성(印星)은 내가 겪은 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곱씹는 성향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누가 힘들 때 건네준 말 한마디를 몇 년 뒤까지 기억하는 마음을 여기에 비춰볼 수 있다. 말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을 들을 때 어디에 앉아 있었는지,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까지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아팠던 말도 그렇게 남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아내가 문자를 읽고 떠올린 건 ‘남편이 또 그랬다’는 결론보다 ‘그날도 나는 이 말을 믿고 밥을 데웠지’라는 기억에 가깝다. 같은 문장이어도 남편에게는 오늘 회식 이야기이고, 아내에게는 예전에 혼자 기다렸던 저녁까지 담겨 있다. 그 기억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아내의 성향을 단정할 수는 없다. 남편이 한 선택의 책임도 아내의 사주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주풀이를 내 생활에 가져온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볼 수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할까?’ 하고 물으면 고쳐야 할 게 나한테만 있는 것 같다. ‘다음번엔 무엇이 달라지면 저녁을 조금 편히 보낼 수 있을까?’ 하고 물으면 원하는 게 하나 떠오른다. 아내에게는 회식이 늦어졌다는 사실을 자기가 묻기 전에 듣는 것이었다.

    ■ 남편은 연락했다고 생각했고, 아내는 또 기다렸다고 느꼈다

    남편 쪽에서는 “먼저 먹어”라는 말이 나름의 배려였을 수 있다. 자신도 끝날 시간을 모르니 밥이라도 먼저 먹으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내에게 중요했던 건 아홉 시에 오느냐, 열 시에 오느냐가 아니었다. 일곱 시쯤 이미 늦어질 걸 알았다면, 그때 자신을 떠올리고 먼저 알려줄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덜 지치는 방법은 그 차이를 말로 꺼내는 것이다. 아내라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나도 회식 끝나는 시간을 딱 맞히라는 건 아니야. 늦어진다는 걸 알았을 때 먼저 한마디 해줘. 내가 몇 시간 기다리다가 물어봐야 알게 되는 건 아직 힘들어.”

    남편도 그 자리에서 정확한 귀가 시간을 맞힐 필요는 없다. “지금 보니 저녁은 같이 못 먹겠어. 아직 끝날 시간은 모르겠는데, 자리 끝나면 내가 전화할게.” 이 정도면 아내는 적어도 밥을 더 데워 놓을지 말지 자기 저녁을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자리가 끝났을 때는 아내가 먼저 묻기 전에 남편이 전화를 걸면 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건 남편이 다음 회식 날 무엇을 하느냐다. 아내가 얼마나 차분하게 설명했는지보다 남편이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하고 지키는지가 오래 남는다. 아내가 서운함을 꺼낼 때마다 더 좋은 표현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니다.

    ■ 다음 회식 날, 국을 한 그릇만 뜰 수 있게

    다음 주 목요일, 일곱 시 반에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아홉 시쯤 끝날 것 같아. 더 늦어지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

    아내는 여전히 시계를 한 번 봤다. 그래도 그날은 자기 몫의 국을 한 그릇 떠서 따뜻할 때 먹었다. 밥을 먹다가 남편 생각이 났지만 숟가락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부터 들지는 않았다. 아홉 시에 끝날지 조금 더 늦을지는 두고 보면 될 일이었다. 적어도 오늘 저녁을 언제 시작할지는 자기가 정할 수 있었다.

    다시 믿는다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상태는 아닐 것이다. 늦으면 알려주겠다는 사람이 실제로 알려주고, 묻고 싶은 날에는 눈치를 보지 않고 물을 수 있는 저녁이 하나씩 늘어나는 일에 가깝다.

    혹시 오늘도 ‘용서해 놓고 왜 이러지’ 하며 썼던 문자를 지웠다면, 그 질문은 그대로 보내도 좋다. “오늘 몇 시쯤 들어와?” 함께 사는 사람에게 그 정도는 편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